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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정수 - 윌리엄 에임스(16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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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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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종에는 두 부분이 있다. 덕과 덕을 실천하는 행위이다. 벧후 1:5. 너희 믿음에 덕을 더하라. … 이런 것들이 너희에게 있어 풍성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 게으르거나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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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구분은 전체를 그 구성 부분으로 나눈 것이다. 두 부분은 본래 결합하여 하나의 순종을 이루기 때문이다.
3. 그러므로 덕과 그 행위는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같은 정의로 설명한다. 둘의 본성이 같기 때문이다. 논리학의 논거도 그 자체로 살피든 명제와 삼단논법 속에서 살피든 이름과 본성이 같다.
4. 덕은 의지가 바르게 행하도록 기울게 하는 성향이다.
5. 여기서 성향은 단순한 기질과 구별되는 굳고 완전한 마음의 상태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 생에서 그런 수준의 덕을 받는 사람은 드물다. 여기서는 덕과 마음 상태의 온전한 단계와 불완전한 단계를 모두 아우르는 넓은 뜻으로 쓴다.
6. 이를 성향이라 부르는 것은 사람이 그것을 지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이 자리하는 주체160가 일정한 방식으로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본래 선을 향해 정해져 있지 않은 기능을 선으로 향하게 한다는 뜻이다. 히 5:14. 익숙한 사용으로 감각을 훈련하여 선과 악을 분별하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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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덕은 의지에 자리한다. 첫째. 의지는 생명과 도덕적·영적 행위의 고유한 원리이므로 신학이 고유하게 다루는 주체이다. 둘째. 의지는 마땅하고 바른 선으로 향하는 기능이다. 롬 7:19, 21. 셋째. 덕은 선택하는 성향이며 그 직접적이고 고유한 작용은 자발적 선택이다. 넷째. 의지는 다른 기능들을 지휘하므로, 모든 기능을 바르게 인도하려면 의지에 덕이 있는 것이 가장 알맞다. 다섯째. 의지는 그 자체로나 이성만으로는 선한 행위를 하도록 충분히 정해지지 않으므로, 바르게 행하려면 고유한 내적 성향이 필요하다. 여섯째. 다른 기능은 강제될 수 있으므로, 덕이 거기에 고정되어 있다면 사람이 원하지 않아도 덕을 잃을 수 있다. 일곱째. 칭찬은 무엇보다 의지의 행위에 합당하며, 다른 기능의 작용도 의지에서 나오고 의지에 의존하는 한 칭찬받을 만하다. 덕이 칭찬받을 만하다는 것은 철학자들뿐 아니라 사도도 가르친다. 빌 4:8.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칭찬이 있든지. 여덟째. 지성의 성향이 아무리 완전해도 사람을 선하게 하지는 못하므로 지성이 덕의 자리가 될 수 없다. 감각적 욕구도 덕의 자리가 될 수 없다. 그런 욕구가 없는 천사들과 몸을 떠난 영혼들에게도 참된 덕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감각의 기능에는 의지의 바른 명령에 더 쉽게 따르게 하는 성향들이 흔히 있으며, 그런 점에서 그것들은 덕과 어느 정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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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덕은 선을 향하게 한다고 한다. 첫째. 사람을 악으로 기울게 하는 악한161 성향과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계 7:17, 20, 23 [개정본에는 롬 7:17, 20, 23 표기]. 둘째. 의지가 바르게 행할 길을 보도록 빛을 주기는 하지만 실제로 바르게 행하도록 의지를 기울게 하지는 않는 지성의 능력과도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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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러므로 참되고 견실한 덕은 그것을 지닌 사람을 언제나 선하게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성향 자체가 하나님께 처음 받아들여지게 하는 은혜라는 뜻은 아니다. 스콜라 학자들이 그렇게 말하지만, 그것은 믿음에 속한다. 선한 사람과 덕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고, 그 덕에서 우리의 행위로 선함이 흘러나온다는 뜻이다.
10. 그러므로 덕이 행위의 원리로 작용할 때에는 아무도 덕을 잘못 쓸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마음의 다른 성향은 무엇이든 잘못 쓸 수 있으며 흔히 그렇게 한다.162
11. 그러므로 흔히 지적 덕이라 부르는 것들은 엄밀한 뜻에서 덕이라 하기 어렵다.
12. 또한 덕은 선을 향하게 할 뿐 아니라 바르게 행하게 한다고 말한다. 행위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주로 덕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13. 바르게 행하는 규범과 덕의 규범은 모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다. 삶을 인도하는 일에서 오직 그 뜻만이 확실한 규범이 된다.
14. 아리스토텔레스가 덕의 기준으로 삼은 분별 있는 사람의 판단은 레스보스의 자163와 같다. 우리가 언제나 그 판단을 따를 만큼 지혜로운 사람은 없으며, 설령 있다 하더라도 덕을 실천하는 이들이 언제나 그를 알아보고 조언을 구할 수는 없다.
15. 완전하게 바른 이성을 찾는다면 그것이 있는 곳인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도록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과 다르지 않다. 시 119:66. 뛰어난 분별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습니다. 반면 타락 이후 사람의 마음에 남은 옳고 그름에 대한 불완전한 생각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불완전하고 매우 흐릿하므로 덕의 정확한 규범이 될 수 없다. 실로 그것은 불완전하고 흐릿하다는 점 외에는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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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러므로 덕을 가르치는 학문은 신학이다. 신학은 우리의 이성과 의지와 삶을 인도하도록 계시된 하나님의 뜻 전체를 전한다.
17. 이와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은 분별력 있고 건전한 사람을 움직일 만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그들은 신학의 목적은 은혜에 속한 선이며 윤리학의 목적은 도덕적이거나 시민적인 선이라고 한다. 이는 마치 도덕적이거나 시민적인 선은 어떤 면에서도 은혜에 속한 영적 선이 될 수 없으며, 사람에게 고유한 선과 복과 목적이 여럿이거나, 사람을 그의 목적과 최고의 선으로 이끌지 않는 것도 사람의 덕이 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또 신학은 사람의 내적 정서를 다루고 윤리학은 외적 행실을 다룬다고 한다. 이는 마치 그들이 의지와 욕구를 다스리는 분별이라고 정의하는 윤리학이 내적 정서와 무관하거나, 신학이 내적 순종과 함께 외적 순종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들은 윤리학이 이 생에 한정되고 신학은 오는 생에까지 이른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치 복된 삶이 하나가 아니거나, 동일한 삶이 현재에 있느냐 장차 있느냐에 따라 규범이 달라진다는 말과 같다. 또 윤리학의 대상은 인정받는 선하고 바른 사람이며, 신학의 대상은 경건하고 신앙심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도는 신학이 우리에게 경건하고 신앙심 있게 살 뿐 아니라 절제하고 의롭게, 곧 인정받을 만하고 바르게 살도록 가르친다고 명시한다. 딛 2:12. 반대 견해를 가장 열렬히 옹호하는 이들도 도덕적 덕이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신학적 덕의 한 단계이며, 도덕적 덕과 영적 덕의 관계가 따뜻함과 뜨거움, 아침 빛과 한낮의 빛의 관계와 같다고 인정하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따뜻함과 뜨거움, 아침 빛과 한낮의 빛을 같은 학문에서 가르치듯, 도덕적 덕과 영적 덕도 함께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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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그러므로 뛰어난 학자 페트루스 라무스164의 판단과 바람은 분별 있는 만큼 경건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면,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끌어내어 가르치기보다 학식이 있고 행실이 검증된 신학자가 복음에서 끌어내어 아이들에게 이 철학의 가르침을 전하기를 바란다. 아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많은 불경건을 배울 것이며, 그것을 너무 늦게 잊을까 염려된다. 복의 시작이 사람에게서 나고 그 끝도 사람 안에 머문다는 것, 모든 덕이 전적으로 사람의 힘에 달려 있으며 타고난 본성과 기술과 노력으로 얻는다는 것, 이러한 일이 크고 신적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돕는 이로도 행하는 이로도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것, 인간의 삶이라는 무대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배제된다는 것,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것, 사람의 복이 이 연약한 생에 있다는 것 등이 그러하다.
19. 하나님을 향하게 한다는 점에서 덕이라 불리는 이 성향은 하나님께서 주시고 성령께서 불어넣으신다는 점에서 선물이라 불린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호의로 값없이 베푸신다는 점에서 은혜라 하고, 그 완전함과 거기서 느끼는 유익과 달콤함에 비추어 열매라 한다. 영생의 소망을 준다는 점에서 이를 복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
20. 그러므로 사 11:2. 여호와의 영이 그 위에 머무시리니, 지혜와 명철의 영, 모략과 능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다. 이 말씀에서 성령의 은사 일곱을 뽑아내어 이를 덕과 세밀하게 구분하고 각각이 어느 덕에 상응하는지 증명하려 애쓰는 것은 헛수고이다. 그곳에 일곱 이상이 열거되지 않았고 실상 여섯만 나열되었더라도, 성령의 은사가 일곱뿐인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는 그리스도를 말하므로 그분께 어울리는 으뜸가는 왕적 은사들만 언급하고, 제유법으로 다른 은사들도 포함한다. 또한 거기 언급된 은사들은 실상 덕과 따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환유법으로 그 원인들을 들어 모든 덕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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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고전 12:4에 언급된 은혜의 은사들은 실제로 덕과 구별된다. 그러나 은혜라는 말이 우리 안에 자리한 완전함을 가리킬 때에는 어느 한 덕을 나타내거나, 모든 덕을 그 뿌리에서 함께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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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마찬가지로 갈 5:22.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이다. 이 말씀에 통용 번역본이 덧붙인 항목을 보태 성령의 열매 열둘을 뽑아내고, 앞서 은사를 다룬 것처럼 그것들을 덕과 견주는 것은 헛되다. 그곳에서는 당시의 필요에 따라 성령의 열매를 들고 덕 자체의 이름으로 설명하였을 뿐이다. 덕은 농부가 구하고 기다리는 열매와 같다. 열매는 농부가 뿌린 씨의 본성에 맞고, 누릴 때 유익과 달콤함을 준다. 이 모든 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덕과 그 행위에 어느 정도 들어맞고, 특히 그 유익은 우리에게 해당한다. 그러므로 모든 덕을 아우르는 거룩함은 성령의 열매라고도 하고 우리의 열매라고도 한다. 롬 6:22. 갈라디아서의 이 대목에서 기쁨과 평안이 열매가 맺는 열매로 열거된 것은 그 유익과 달콤함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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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그리스도의 설교에서 여덟 가지 복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같은 판단을 내린다. 마 5장. 복은 하나이지만 그 표지는 여럿이다. 곧 모든 견실한 덕과 그 행위이다. 주께서는 자기 나라에 가장 합당하고 사람의 통상적인 생각과 크게 다른 몇 가지 덕이나 그 행위를 제시하신다. 한편으로는 복을 약속하여 그것을 행하도록 권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추구하고 고백하는 모습으로 복 또는 복된 사람을 설명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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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덕의 공통 속성은 흔히 네 가지 기본 덕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25. 이것들은 덕을 네 종류로 나누는 범주가 아니다.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개별 덕을 억지로 그 네 항목에 넣으려 했는데, 이는 덕과 이성 자체를 모두 무리하게 다루는 일이다. 이것들은 덕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한 성향에 반드시 필요한 네 조건이다.
26. 첫째는 넓은 뜻의 정의이다. 각 사람에게 마땅한 몫을 주어 바르게 행하려는 성향을 가리키며, 덕의 올바름이라 부를 수 있다. 사도는 여러 말을 모아 덕을 설명한다. 빌 4:8. 무엇이든지 참되며, 무엇이든지 존귀하며, 무엇이든지 의로우며, 무엇이든지 순수하며, 무엇이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이든지 좋은 평판을 얻으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칭찬이 있든지. 진실과 정의와 순수함은 동일한 덕의 본성을 드러내지만, 정의가 그 본질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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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둘째는 분별이다. 분별로 이성의 모든 힘을 써서 옳은 것을 찾아내고, 그에 이르는 모든 방편을 바르게 이끈다. 그러므로 분별은 바르게 행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가려내는 일이며, 명철과 지식과 지혜의 힘을 포함한다. 흔히 지적 덕이라 부르는 지성의 여러 능력은 그 힘으로 의지가 바르게 행하도록 인도되는 한에서만 덕에 속한다.
28. 성경은 이를 영적 명철과 지혜라 부른다. 골 1:9. 명철은 선과 악을 일반적으로 알아보는 것을 가리키고, 지혜는 그 분별을 구체적 사정에 놓인 개별 사안에 적용하는 것을 뜻한다. 명철이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지혜는 ‘유익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고전 6:12, 10:23. 이와 반대되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엡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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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도 이와 반대된다. 엡 4:18. 그들 속에 있는 무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 또한 이를 판단(고전 2:15)과 분별(빌 1:10)이라 한다. 이와 반대되는 것은 헛된 마음(엡 4:17)과 판단력을 잃은 마음(롬 1:2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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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이 분별은 다음과 같이 실천해야 한다. 첫째. 주위를 살피고 조심하며 부지런해야 한다. 성경은 이를 흔히 깨어 있음이라 하여 칭찬한다. 막 13:33. 주의하고 깨어 기도하라. 어리석은 처녀들을 사로잡은 졸음은 이와 반대된다. 마 25:5, 13. 둘째. 사안의 비중에 맞게 선택해야 한다. 더 큰 의무를 작은 의무보다 앞세우고, 각각에 마음과 힘을 얼마나 기울일지 적절한 정도를 지켜야 한다. 마 6:33, 고전 12:31, 14:1.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특히 예언하기를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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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셋째는 용기이다. 이는 바르게 행하는 일을 굳게 계속하며, 행위를 지속하는 데서나 그 밖의 장애에서 생기는 모든 어려움을 견디고 이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어에서는 여자에게 덕을 돌릴 때에도 이를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나타낸다고 한다.165 잠 31:10. 모든 덕에는 강하게 되는 일이 필요하다. 엡 3:16. 용기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첫째. 칭찬받는 담대함이다. 행 4:29. 이와 반대되는 것은 두려움이다. 빌 1:14.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말씀을 전한다. 둘째. 인내와 한결같음이다. 계 2:26. 이기고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자. 이와 반대되는 것은 마음이 약해지고 선을 행하다 지치는 것이다. 살후 3:13, 갈 6:9, 히 12:3, 12. 낙심하지 말자. 지치지 말라.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하라. 힘 빠진 손과 약해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 셋째. 견딤 또는 인내166이다. 약 5:7–8, 히 10:36.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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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넷째 조건은 절제이다. 절제는 사람을 바른 행위에서 돌이키는 모든 욕망을 가라앉히고 억제하여 덕이 더럽혀지지 않게 한다. 딤후 2:4. 군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신을 얽매이지 않는다. 벧전 1:13.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정신을 차리라. 성경은 더 넓은 뜻에서 이를 흔히 정신을 차리는 것이라 부른다. 벧전 1:13, 5:8. 또한 마음의 순수함 또는 깨끗함이라 하고(딤전 1:5, 벧전 2:22), 불순한 것이 섞이지 않게 한다는 뜻에서 진실함이라 한다. 이 말의 뜻은 고후 1:12에 드러난다. 육체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소박함과 진실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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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덕의 네 조건 가운데 첫째는 덕을 질서 있게 하고 말하자면 그 덕을 이룬다. 둘째는 덕을 인도하고 오류에서 벗어나게 한다. 셋째는 어려움에 맞서 덕을 굳게 한다. 넷째는 덕을 순수하게 하며 덕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온갖 유혹에서 지킨다.
33. 이 덕들은 거의 이름을 들어 한데 명하고 설명한 듯하다. 벧후 1:4, 6〔원문 표기. 해당 열거는 1:5–7〕. 믿음에 덕을 더하라는 것은 정의, 곧 모든 면에서의 올바름을 더하라는 말이다. 덕에 지식을 더하라는 것은 모든 길을 바르게 인도하는 분별을 더하라는 말이다. 분별에 자제167를 더하라는 것은 사람을 홀리고 바른 길에서 끌어내는 온갖 쾌락의 유혹을 억제하는 절제를 더하라는 말이다. 자제에 인내를 더하라는 것은 의를 위하여 어떤 고난도 견디는 용기를 더하라는 말이다. 그 뒤에 나오는 경건과 사랑은 덕의 구분을 담고 있으며, 알맞은 곳에서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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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다만 이 속성들168은 어떤 덕에서 다른 덕보다 더 뚜렷이 드러나므로, 어떤 개별 덕은 그 속성에서 이름과 정의를 얻는다. 사람이 서로 주고받는 것의 수와 분량과 무게와 가치에서 정확한 올바름이 가장 두드러지므로, 정의를 특별히 그런 일에 적용한다. 전쟁과 그와 같은 위험에서 생기는 어려움을 가장 두렵게 여기므로, 용기라는 이름을 흔히 그런 일에 한정한다. 감각의 쾌락이 사람을 가장 강하게 유혹하므로, 절제를 주로 그런 쾌락에 적용한다. 다만 넓은 뜻에서 보면 이 셋과 분별은 서로 긴밀히 얽혀 있다. 네 덕의 항목을 거의 처음으로 제시한 그 철학자도 이를 알아보았다.
35. 많은 사람은 덕의 형식이 두 극단적인 악덕 사이의 중용169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다음 논거들은 그 견해에 반대된다. 첫째. 어떤 것의 부재는 성향의 형식이 될 수 없는데, 중용은 부족함과 지나침이 없다는 것일 뿐이다. 둘째. 덕의 형식은 그 규범에 일치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이 일치는 중용에만 있지도, 주로 중용에 있지도 않으며, 어떤 경우에는 중용과 전혀 관계가 없다. 셋째. 덕은 그 형식 자체를 두고 보면 지나치게 강화될 수 없다.170 지나침은 덕이 악덕과 공유하는 행위의 소재나 그 행위의 정황에서 생길 수 있을 뿐이다. 행하지 말아야 할 때 행하거나 행해야 할 때 행하지 않는 경우가 그러하다.
36. 모든 덕에서 찾을 수 있는 중용이란 그 규범이나 척도에 일치하는 것뿐이다. 이로써 덕은 그 본성이 머무는 일정한 척도와 한계를 얻어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빗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중용이 덕의 형식이라면, 일정한 형식과 차이로 구별되는 다른 모든 것의 형식이기도 할 것이다.
37. 두 악한 성향171 사이에 놓인 덕도 가운데에 있다는 이유로 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규범이 정한 방식으로 가운데에 있기에 덕이 된다. 이 경우 중용은 참여나 부정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든, 사물 자체의 중용이든 관점상의 중용172이든, 덕을 완성하는 형식보다 그 소재로 보아야 한다.
38. 이런 중용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덕도 분명히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지나치지 않아서 칭찬받는 것이 아니라 가장 뜨겁기에 칭찬받는다. 여기서는 헤아릴 수 없이 사랑하는 것이 척도이다.
39. 각 덕을 그 고유한 종류의 본성173에 비추어 보아도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 주어서는 안 될 때 주는 이는 너그러움이 지나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주는 행위를 지나치게 하여 그 점에서 너그러움을 잃으며, 같은 행위에서 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아 그만큼 부족할 수도 있다.
40. 지혜자는 지나치게 의롭게 되지 말라고 권한다. 전 7:16. 그러나 이는 의 자체에 관한 말이 아니다. 뒤의 제20절은 땅 위에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이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의견으로 지나친 몫을 요구하며 그것을 의의 이름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가리킨다. 참된 덕에서는 성경이 자주 권하듯 언제나 더욱 풍성해지도록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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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같은 종류의 덕을 그 자체의 적용 범위에서 보면 정도의 차이는 없다. 모든 덕은 적어도 성향의 면에서 그 대상의 범위에 드는 모든 것에 미치기 때문이다. 한 가지에서는 자신을 억제하고 다른 일에서는 자신을 방임하는 사람은 절제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덕을 지닌 사람에 따라 어떤 덕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보다 강하다. 타고난 성향이 더 알맞거나, 더 많이 익혔거나, 이성의 판단이 더 온전하거나, 하나님께 더 큰 선물을 받은 까닭이다.
42. 날마다 사용하고 훈련하면 덕이 자란다는 말은 성화의 은혜에서 나오는 견실한 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날마다 훈련하는 일은 덕이 자라도록 준비시키는 원인이며, 하나님의 약속의 효력으로 어느 정도 그 성장을 얻게 하는 원인이다. 그러나 그 성장을 직접 이루는 주된 원인은 아니다.
43. 덕은 그에 반대되는 악한 행위로 약해진다. 그러한 행위가 만들어 내는 성향 때문이기도 하고, 그 행위가 마땅히 받아야 할 보응 때문이기도 하다.
44. 덕의 행위나 그와 반대되는 악덕의 행위가 더 강하고 빈번하고 지속적일수록, 덕을 더 크게 자라게 하거나 약하게 한다.
45. 이로부터 덕을 인간적인 덕과 영웅적인 덕으로, 또 정화하는 덕과 정화된 덕과 모범적인 덕으로 구분한다. 덕을 지닌 이들도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으로 구분한다. 히 5: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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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덕들의 교통은 서로 결합하고 서로 종속되는 데 있다.
47. 결합은 반드시 필요한 모든 덕이 서로 이어지는 것이다. 첫째. 덕이 흘러나오는 근원이 같다. 모든 좋은 선물과 온전한 선물은 빛들의 아버지에게서 은혜의 영을 통하여 내려온다. 약 1:17, 고전 12장. 둘째. 목적과 지향이 대체로 같다. 모든 덕은 하나님을 향하므로 하나에서 그분의 권위를 범하면 그 효력에서 모든 덕에서 그 권위를 범하는 셈이다. 약 2:10. 셋째. 덕들이 서로 돕는다. 한 덕은 다른 덕의 행위를 준비시키고, 자기 행위로 그 다른 덕을 보호하고 굳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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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그러나 덕들이 본질과 내면에서 결합한다고 해서 각 덕이 다른 덕의 본질에 속하거나, 다른 덕을 낳는 원인으로 반드시 그것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49. 덕들의 종속이란 한 덕의 행위가 다른 덕의 행위와 대상을 향하도록 질서 지어지는 것이다. 방편이 목적에 종속되는 경우에는 상위 덕이 하위 덕에 명한다. 신앙이 정의와 절제 등의 행위를 하나님의 예배와 영광을 더하는 데 쓰도록 명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원인이 결과를 낳도록 질서 지어지는 경우에는 각 덕이 다른 덕을 향해 작용한다. 이 점에서 신앙 자체도 정의를 낳고 보전하도록 정해져 있다.
50. 한 덕의 행위가 다른 덕의 목적을 향하도록 질서 지어질 때, 그 방향을 정하는 일은 분별에 달려 있고, 실제로 그 행위를 움직이는 힘과 권위는 상위 덕에 달려 있다.

각주

160
사람 일반뿐 아니라 덕을 움직이는 특정 기능을 가리킨다. 에임스는 이를 의지로 본다. ↩
161
악덕에 기울어 있는. ↩
162
덕이 행위를 움직이면 그 행위는 덕이 있는 행위이다. 사람이 옳고 선한 것을 알면서도 그 지식을 잘못 써서 악을 행한다는 사실은 이를 바꾸지 않는다. ↩
163
레스보스의 자는 납으로 만든 휘어지는 석공의 자이다. 몰딩의 곡선에 맞게 구부릴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공평한 결과를 내려면 법의 일반 규칙을 개별 사정에 맞춰야 한다. 누구나 사정을 알아볼 수는 있어도 누구나 법을 적용하여 정의로운 결과를 이끌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경험과 중요한 차이를 알아보는 능력을 갖춘 사람은 사정에 맞게 법을 적용하여 선한 결과에 이를 수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2권 제1장과 제5권 제10장 참조. ↩
164
페트루스 라무스(1515–1572)는 프랑스의 인문주의자이자 논리학자이며 교육 개혁가였다. 1561년에 개신교로 개종했고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에서 살해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반대하여 『Dialecticae partitiones』에서 요약, 표제, 인용과 예를 사용하여 옛 스콜라 논리학을 새로운 추론의 학문으로 바꾸자고 했다. 프랑스,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에서 그의 학파가 형성되었다. ↩
165
히브리어로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를 뜻하는 마시아흐, 곧 메시아이다. 에임스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덕과 용기를 구현하신 분이라는 뜻일 수 있다. ↩
166
그리스어 휘포모네는 ‘견딤’으로도 번역된다. ↩
167
보통 ‘자기 절제’로 옮긴다. 킹제임스 성경과 제네바 성경은 ‘절제’, 두에–랭스 성경은 ‘삼감’으로 옮긴다. ↩
168
또는 조건들. 위 제30항의 각주를 보라. ↩
169
중간, 곧 중용. ↩
170
덕을 갖추려는 의도가 지나치게 강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
171
악덕에 해당하는 습관적 성향들이다. ↩
172
실재상의 중용 또는 이성상의 중용.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제23권 「덕」, 제1부의 제2부 문항 55–67 참조. ↩
173
같은 종류에 속한다는 뜻에서 ‘종에 고유한’이라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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