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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정수 - 윌리엄 에임스(16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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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예배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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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제 가장 엄숙한 예배 시간은 매주 첫날이며, 이를 주의 날이라 한다. 계 1:10, 고전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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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거룩한 성찬을 주의 만찬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이유로 주의 날이라 부른다. 고전 11:2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으며, 그 목적과 쓰임도 같은 주께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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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께 예배드릴 시간을 내야 한다는 것은 자연적 이성으로도 알 수 있다. 사람은 모든 행위, 특히 외적 행위에 시간이 필요하다. 그동안 다른 일을 그치지 않으면 합당하게 예배에 전념할 수 없다.
4. 이런 점에서 예배 시간은 예배 자체를 명하는 계명에 속한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실 때 시간도 함께 창조하셨다고 하듯, 신앙 행위를 명하고 정하실 때에도 그에 필요한 정황인 시간을 함께 명하고 정하셨다.
5. 더 엄숙한 예배를 위해 특정한 날을 정하는 것은 자연적 도덕법에도 속한다. 이방인들도 이를 알아 모든 시대에 정해진 절기를 엄숙하게 지켰다.
6. 매주, 곧 일곱 날 가운데 적어도 하루를 그날로 삼는 것은 제정법에 속한다. 그러나 이는 변하지 않는 제도이다. 우리의 의무와 구속력에서는 자연적 도덕법과 같은 효력이 있다. 따라서 스콜라 학자들이 이를 본성이 아니라 규율에 따른 도덕법에 속한다고 한 것은 옳다.
7. 이 제도가 일시적인 의식법이 아니라는 것은 유대인이나 의식법 시대에만 해당하는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규정에는 적어도 도덕적인 이유와 유익이 있을 수 있다. 자연적 이성은 바로 이 규정이 필수라고 가르치지는 않으나, 하나님께 자주 예배하는 것이 합당함을 알고 그런 빈도로 날을 정하는 것도 알맞다고 인정한다.
8. 창조의 시작부터 일곱째 날, 곧 일곱 날 가운데 하루가 예배를 위해 구별되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때에는 구속자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의식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창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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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어떤 이들은 이 기록이 훗날의 일을 앞당겨 말한 것이거나, 하나님께서 그때 일곱째 날을 뜻과 계획에서만 거룩하게 하셨거나, 장차 거룩하게 할 토대만 놓으셨고 의무나 법 자체는 주지 않으셨다고 주장한다.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 있다. 첫째. 주의 날 준행에 편견을 가진 사람만이 이런 선취를 생각했다. 옛 유대인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고, 이 절기가 세상의 시작부터 모든 민족에게 있었다고 보았다. 필론225 참조. 신약에도 그런 주장이 없다. 이 견해를 제시한 수아레스226조차 창조의 시작부터 일곱째 날을 어느 정도 지켰을 가능성을 인정한다. 주의 날을 지나치게 중시했다고 할 수 없는 루터와 칼뱅 같은 해석자들도 창조 때부터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되었다고 인정한다. 둘째. 성경에 이와 같은 선취의 예가 없다. 창세기 등에서 장소 이름을 앞당겨 쓰는 일은 있지만 제도를 그렇게 서술한 곳은 없다. 셋째. 본문의 말과 표현이 반대를 입증한다. 창 2:2–3. 창조의 완성과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신 일이 두 번이나 함께 나오는데, 다른 피조물과 사람의 창조에 복 주심이 함께 나오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창 1:21–22, 27–28. 넷째. 하나님의 뜻이나 토대만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복 주셨다는 표현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부수리라고 약속하신 때부터 하나님께서 새 언약의 성례를 위해 물과 떡과 포도주를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창 3:15. 그때 하나님은 이런 인으로 은혜 언약을 인치기로 뜻하셨고, 그 토대는 약속과 인치는 데 쓸 것들의 창조에 이미 놓였기 때문이다. 다섯째. 선지자는 첫 창조에 놓인 토대에서 영속적인 법을 이끌어 낸다. 말 2:15. 하나를 만드시지 않았느냐? 왜 하나이냐? 경건한 후손을 구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왜 일곱째 날에 쉬셨는지 물을 수 있다. 그날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여섯째. 사도의 논증도 여기에 근거한 듯하다. 히 4:3–5, 7–9. 구약에서 경건한 이들이 이 생에서 누린 안식은 안식일의 안식과 가나안 땅의 안식이다. 시 95편에서 다윗이 약속한 것은 창조 때부터 있던 안식일의 안식도, 이미 지나간 가나안의 안식도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하늘에서 누릴 셋째 안식, 곧 영원한 안식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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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초기 족장들이 일곱째 날을 엄숙히 지켰다는 기록이 창세기에 없어도 이 진리를 거스르지 않는다. 첫째. 그들이 천오백 년 동안 지킨 모든 일을 창세기처럼 짧은 역사에 낱낱이 기록할 수 없었으며 그럴 필요도 없었다. 모세가 안식일 법을 전한 뒤에도 사사기와 다른 일부 역사서에는 그 준행이 나오지 않는다. 둘째. 이 날의 준행이 대체로 소홀했다고 인정하더라도 최초의 제정이 의심스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일부다처가 혼인의 거룩한 법이 최초의 혼인과 함께 주어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셋째. 시내산에서 율법을 선포하기 전부터 안식일 준행은 새 일이 아니라 오래전에 정해진 일로 제시되고 촉구되었다. 출 16:24, 30. 제사와 다른 의식에도 비슷한 점이 있지만, 앞서 든 이유에 비추어 안식일은 사람의 창조와 함께 이루어진 최초의 제정과 관련된다. 제30절의 ‘너희에게 주셨다’는 과거 표현도 이를 드러낸다. 넷째. 이방인들에게도 일곱째 날을 지킨 흔적이 있어, 그들의 조상인 족장들에게서 전해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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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 마지막 권에서 그리스인이든 다른 민족이든 일곱째 날의 휴식을 관습에 받아들이지 않은 곳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도 『스트로마타』 제5권227에서 히브리인뿐 아니라 그리스인들도 일곱째 날을 지킨다고 밝힌다. 유세비우스는 『복음의 준비』 제13권에서 히브리인뿐 아니라 거의 모든 철학자와 시인도 일곱째 날이 더 거룩하다고 알았다고 한다. 람프리디우스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도성에 있을 때 일곱째 날에 카피톨리움에 올라 신전들을 찾았다고 전한다. 학교에서도 일곱째 날에 아이들에게 휴일을 주곤 했다는 사실이 이와 관련된다. 루키아노스의 『거짓말쟁이』와 아울루스 겔리우스 제13권 제2장을 보라. 수에토니우스가 제3권에서 디오게네스에 관해 전하듯, 안식일에만 토론하던 이방 학자들도 있었다.228 헤시오도스의 날에 관한 기록도 참조하라.
다섯째. 넷째 계명 첫머리의 권고인 ‘기억하라’는 말씀 자체가 이전에 이 날을 잊거나 소홀히 한 일을 책망한다.
11. 이 제도의 권리와 영속적인 도덕적 권위는 십계명에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로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가장 뛰어난 신학자들이 인정하는 확실한 원칙에 따르면, 하나님은 의식법과 재판법을 도덕법과 구별하셔서 오직 도덕법만을 모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친히 선포하셨다. 또한 그 영속성과 불변성을 나타내시려고 친히 손가락으로 쓰시듯 돌판에 쓰고 다시 쓰셨다. 그리스도께서도 이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증언하신다. 마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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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넷째 계명의 내용은 제정법에 속하므로 다른 계명 대부분과 꼭 같은 정도나 방식으로 도덕적이지는 않다. 앞의 세 계명은 부패한 본성이 기울어지는 악덕을 금하는 부정형으로 제시된다. 넷째 계명은 먼저 의무를 적극적으로 밝히고 명한 뒤 그 의무에 어긋나는 것을 금한다. ‘안식일을 기억하라’, 곧 ‘이 날을 지키기를 기억하라’는 특별한 권고가 앞서는 이유도 어느 정도 여기에 있다. 신 5:18〔원문 표기. 해당 구절은 5:12〕. 제정법에 속하므로 더 자연스러운 다른 의무보다 쉽게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규례의 토대인 제정법은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사람은 이를 바꿀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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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넷째 계명을 죄나 이생의 수고를 그치는 일 등의 비유로 돌려, 비유를 즐기는 자들처럼 네 가지나 다섯 가지 안식일을 만들어 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이 계명에 돌리는 뜻은 이제 완전히 폐지된 여러 유대 의식에도 들어맞으며, 오히려 그 의식들에 더 잘 들어맞는다.
14. 넷째 계명을 둘째 계명과 함께 의식법으로 보는 이들은 앞의 논증으로 충분히 반박된다. 또한 십계명에 열 말씀, 곧 도덕적 계명 열 가지가 있다고 명시하는 성경의 증언과도 어긋난다. 출 34:18〔원문 표기. 문맥상 34:28〕, 신 4:13, 10:4. 그들은 아홉 가지, 실상 여덟 가지만 남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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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예배에 얼마의 시간이나 특정한 날을 배정하는 것만 도덕적이라고 보는 이들은 이 규례를 유대인의 성막과 성전 건축보다 더 도덕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성막과 성전도 교회의 모임과 공적 예배를 위해 언제나 알맞은 장소를 정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영속적인 뜻을 보여 주었다. 그들의 논리로는 예배 시간에 관한 도덕적 계명이 장소에 관한 것보다 더 성립하지 않는다. 그들이 넷째 계명에 남긴 ‘절기를 지키라’는 말도 ‘성전에 자주 가라’는 말보다 더 십계명에 넣을 이유가 없다.
16. 해마다 지키는 절기와 초하루 등 순전히 의식적인 규례에도 같은 일반 원칙이 있다. 공적 예배를 위해 알맞은 날을 정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또한 그들의 견해대로라면 이 계명은 개인에게 아무것도 명하지 않는다. 그 견해에서는 날을 정하는 것만 직접 명하는데 개인에게는 공적 예배일을 정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공직자에게만 맡겨지고, 그들에게도 지혜에 따라 공적 예배일을 구별하라는 일반적 지침밖에 없다. 그러면 스무 날이나 서른 날에 한 번을 정해도 이 계명을 어겼다고 책망할 수 없게 된다.
17. 안식일 준행에 의식적 요소가 있었다면 안식일의 본성과 최초 제정에 외적으로 더해진 규정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의 제정이 그 자체로 도덕적이라는 사실에는 지장이 없다. 다른 계명에도 모형의 성격을 지닌 의식적 요소가 더해진 경우가 있다. 첫째 계명에 속하는 가장과 집안 맏아들의 권위에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요소229가 있었던 것과 같다.
18. 성경은 일곱째 날을 지키는 일 자체에 엄밀한 뜻의 의식이나 모형이 있었음을 분명히 밝히지 않는다. 히 4:9에서 앞서 모형으로 예표된 영적 안식을 말하지만, 그 모형은 가나안 땅에서 약속된 안식에만 해당하며 하나님의 안식은 유사한 것으로 비교된다. 넷째 계명이 명하는 안식을 모형이나 그림자로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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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출 31:13, 17과 겔 20:20에서 안식일을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표징이라 하지만, 이를 미래의 은혜를 예표한다고 볼 수는 없다. 첫째. 표징은 흔히 근거나 교훈을 뜻한다. 뛰어난 해석자들도 출 31장의 ‘나와 너희 사이의 표징’이 교훈을 뜻한다고 본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표징이나 모형은 아니다. 요 13:35. 둘째. 이 구절의 안식일은 장차 올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의 표징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통을 공동으로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일이다. 엄숙한 고백이 그 고백하는 내용의 표징이듯, 안식일도 그런 뜻에서 표징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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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구약이 안식일 준행을 그토록 강조하고 위반을 엄히 벌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도 이것이다. 안식일에는 신앙 전체를 공동으로 공개적으로 고백하였다. 이 계명은 율법의 첫째 돌판을 맺으면서 예배의 모든 행위를 위한 날을 명하므로 하나님 예배 전체를 요약한다. 사 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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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안식일을 지키는 데 여러 의식이 정해졌어도, 그 때문에 안식일 준행이 의식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안식일을 매우 경건하게 지키도록 재판법을 마련했다고 해서 그 준행이 재판법이나 정치법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출 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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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창조 때부터 일곱째 날을 지킨 넷째 계명을 유대인의 특별한 형편에 맞추었다고 해서 계명 자체가 의식법이 되지는 않는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리라’는 가나안의 약속이 다섯째 계명을 의식법으로 만들거나, ‘나는 너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이다’라는 서문이 모든 계명을 의식법으로 만들지 않는 것과 같다.
23. 훈육과 종살이의 시대에 맞추어 당시에는 안식일을 더 엄격히 지키라고 명하셨으며 그 엄격함이 모든 시대에 효력을 지니지는 않는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래도 안식일 준행 자체는 분명히 도덕적이며 모든 시대에 공통된다.
24. 유대인에게 명하신 엄격한 안식일 준행 가운데 같은 이유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성경에서 들 수 있는 것은 불을 피우고 일상 음식을 마련하는 일뿐이다. 출 35:3, 16:14. 그것도 특별한 계기에 주어진 명령으로 보인다. 불을 피우는 일은 성막을 건축하는 경우에만 언급되며, 하나님은 그 일도 안식일에는 잠시 멈출230 수 있고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보이셨다. 음식을 마련하는 일은 하늘에서 기적으로 만나가 내리고 안식일에 기적으로 보존되던 경우에만 언급된다. 그리스도의 행적을 보면 그분은 안식일에 불을 피워 음식을 준비하는 일을 인정하신 듯하다. 유대인들이 안식일 잔치에 초대했을 때 그분이 참석하기를 거절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눅 14:1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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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안식일의 이유를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데 돌리는 듯한 곳이 있어도, 안식일이 의식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첫째. 십계명의 서문에서 보듯 모든 계명이 어느 정도 그 해방과 관련된다. 둘째. 안식일 자체가 그 해방과 특별히 관련된다는 근거는 없다. 신 5:15에서 해방을 언급한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신들도 이집트에서 종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여 종들에게 더욱 기꺼이 이 휴식을 주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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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옛날에 주간의 마지막 날을 지킨 것은 하나님께서 첫 창조 때부터 그날에 창조의 일을 그치셨으므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
27. 주간의 마지막 날이 이제 첫날로 바뀐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따른 것이다. 안식일을 바꿀 수 있는 분은 안식일의 주이신 그리스도뿐이다. 막 12:8〔원문 표기. 해당 구절은 2:28〕. 그러므로 그 뒤를 이은 첫날을 주의 날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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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주의 날을 사도들이 제정했다고 인정해도 그 근거는 여전히 하나님의 권위이다. 사도들은 말이나 글로 복음의 교리를 제시할 때와 마찬가지로 거룩한 제도를 정할 때에도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
29. 또한 이 제도는 잠시 지속될 특별한 계기에 근거하지 않으므로 일시적일 수 없다. 따라서 이를 정한 이들은 이날의 준행이 영속적이고 불변하는 규례가 되기를 뜻했다.
3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셨을 가능성이 더 크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두루 필요하고 유익한 것을 정하시는 일에서 모세보다 덜 신실하지 않으셨다. 히 3:2, 6. 주의 날을 지키는 일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체로 유익하고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치에 맞게 부인할 수 없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뒤 바로 그날 한곳에 모인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다. 요 20:19, 26. 셋째. 바로 그날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다. 행 2:4. 넷째. 사도 시대 교회가 첫날을 지킨 기록에서는 이를 최근에 생긴 규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들 모두가 오래 받아들여 온 일로 말한다. 행 20:7, 고전 16:2. 다섯째. 사도들은 그리스도께 받은 것을 교회에 전했다. 고전 11:23. 여섯째. 매주 하루를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거룩하게 하라는 영속적인 법이 유효하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뒤 이 제정을 한 주도 미룰 수 없었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일곱째 날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폐지되었다. 사도들이 뒤에도 안식일에 유대인의 모임에 참석한 것은(행 13:14, 16:13, 17:2, 18:4) 주로 그때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할 가장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바울이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가려고 한 것도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일 때였기 때문이다. 행 20:16. 일곱째. 어떤 이들의 말처럼 사도들이 유대인과 갈라져 따로 모일 때까지(행 18:6–7, 19:8) 주의 날 제정을 미루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뒤 삼 년이 넘는 동안 넷째 계명은 누구에게도 특정한 날을 지키도록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대인의 날은 이미 폐지되었고 새날도 아직 없었으므로 아홉 계명231만 유효했을 것이다. 여덟째. 모두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돌리는 이 변경의 이유도 이를 확증한다. 이날 새 세상, 곧 오는 세상의 창조가 완성되어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히 2:5, 고후 5:17.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가장 큰 일을 마쳐 쉬셨다. 첫 창조 때 하나님께서 쉬신 날에 복을 주고 거룩하게 하셨듯이, 그리스도께서도 수고를 마치고 쉬신 바로 그날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 합당했다. 옛 저술가들이 든 시 118:24. 이날은 여호와께서 만드신 날이다. 이 근거도 쉽게 물리칠 수 없다. 그 대목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풀이하신 것처럼 그분의 부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 21:42. 아홉째. 신약의 예배를 정하시고 모든 예배에서 복과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그 예배의 날도 정하시는 것이 가장 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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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주의 날 준행을 기록되지 않은 전통으로 보는 견해는 다음과 같이 반박된다. 첫째.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판단에서, 기록되지 않은 전통에 의존하는 것 가운데 주의 날 준행만큼 중대한 것은 없다. 둘째. 이 견해는 온갖 미신과 사람이 고안한 제도를 하나님의 교회에 들이거나 이미 들인 것을 떠받칠 길을 연다. 셋째. 로마 가톨릭 교도 가운데도 이 주장을 부끄러워하는 이가 많다. 교회의 전통에 지나친 권위를 주어 자기들의 미신을 감싸는 이들 가운데도, 주의 날 준행에서 하나님의 권위가 뚜렷함을 보고 그것을 사람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에 돌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바녜스의 제2부 제2편 문항 44 제1항, 『피사 총서 보유편』의 ‘주일’ 항목, 아바스의 Licet de feriis 제3항, 아우구스티누스의 ‘휴일’ 제3항, 실베스테르의 ‘주일’ 문항 1과 7을 보라. 로마 교황 알렉산데르 3세도 교회법의 Licet에서 구약과 신약 성경이 모두 일곱째 날을 사람의 휴식으로 특별히 지정했다고232 말한다. 수아레스가 『절기에 관하여』 제1장에서 풀이하듯, 두 언약은 매 일곱 날마다 하루를 사람의 휴식으로 지정하는 방식을 인정했다. 형식상 일곱째 날을 정했다는 뜻이지 실제로 언제나 같은 요일을 정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옛 율법의 그날은 안식일이었고 새 언약에서는 주의 날이다.
4. 넷째. 주의 날을 전통에 넣는 이들은 유아세례도 같은 부류에 넣으며, 겉으로는 그 근거가 더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런 전통의 예에 답한 우리 신학자들은 이 제도들과 그처럼 유익하고 필요한 다른 모든 제도를 성경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32. 반대 근거로 흔히 드는 롬 14:5, 갈 4:10, 골 2:16은 이 진리에 아무 지장도 주지 않는다. 첫째.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날을 신앙의 목적으로 지키는 일을 정죄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같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음식을 신앙의 목적으로 택하는 일도 정죄하지 않는 것과 같다. 어느 그리스도인도 이 구절에서 주의 만찬에 떡과 포도주를 쓰는 일이 부당하거나 그리스도께서 정하지 않으셨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주의 날 준행에 반대하는 결론도 낼 수 없다. 둘째. 사도가 롬 14장에서 명시적으로 말하는 것은 당시 그리스도인 사이에 걸림돌이 된 날의 구별이다. 사도 자신이 가르쳤으며 모든 교회에 자리 잡은 주의 날은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고전 16:1–2. 셋째. 사도가 다룬 것은 특정 음식을 먹거나 삼가는 날을 고르는 일인 듯하다. 제2절의 논쟁은 음식에 관한 것이며, 제5–6절에서 날을 구별하는 일을 같은 문제에 연결한다. 그 뒤로는 그 장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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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만을 다루고 날을 더 언급하지 않는다. 넷째. 갈라디아서에서는 약하고 빈약한 초등 원리에 매이는 일에 속하는 날과 달과 해의 준행을 다룬다. 갈 4:9. 십계명의 계명이나 그리스도의 규례를 그렇게 여기는 것은 사도의 생각과 거리가 멀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어긋난다. 다섯째. 골 2장은 초하루와 같은 부류에 속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올 일의 의식적 그림자였던 안식일들을 특별히 다룬다. 십계명이 명하는 안식일과 우리의 주의 날은 앞에서 밝힌 것처럼 전혀 다른 성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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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이 견해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줄인다고 걱정할 이유는 없다. 십계명의 어느 계명이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규례를 지킬 의무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다. 주의 날을 합당하게 존중하지 않는 곳에서 방종과 거룩한 일을 소홀히 여기는 태도가 점점 커진다는 것은 경험으로도 알 수 있다.
34. 아담도 일곱째 날을 특별히 지켜 거룩하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종살이에 매이지 않았다.
35. 옛 안식일은 저녁233에 시작되었다. 창조도 저녁에 시작되어 빛보다 먼저 세상의 바탕이 창조되었으며, 창조의 일을 그친 날도 저녁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주의 날은 그날 아침에 시작하는 듯하다. 그리스도께서 이른 아침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막 16:9, 요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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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이날을 바르게 지키려면 쉼과 그 쉼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일이 필요하다.
37. 요구되는 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방해할 모든 일을 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날에는 첫째. 엄밀히 종의 일이라 부르는 모든 일을 삼가야 한다. 옛날 다른 모든 엄숙한 절기에도 그러한 일을 명시적으로 금했으므로(레 23:7–8, 25, 32, 36, 민 28:25), 안식일에는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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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종의 일을 죄나 삯을 바라는 선행으로, 또는 종처럼 보상을 위해 하는 선행으로 비유하여 이해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죄는 특정한 때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금지된다. 모든 죄를 금하는 것은 넷째 계명의 소관이 아니다. 다만 이처럼 거룩한 날에 저지르는 여러 죄가 그만큼 더 무거워질 수는 있다. 사 28:4. 전적으로 종의 마음으로 두려움이나 보상에 대한 기대로 행하는 악한 일도 그 방식에서 다른 죄와 같은 성격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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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엄밀히 말해 종의 일은 통상 종이나 고용된 일꾼에게 맡기는 일이다. 수공 작업과 밭을 갈거나 땅을 파는 등 몸에 큰 수고를 요구하는 일이 그러하다. 둘째. 이날에는 그런 일 외에 우리 자신의 일도 모두 금지된다. 넷째 계명에서 그와 대조하여 허용하는 말씀, 곧 ‘일곱 날〔원문 표기. 해당 말씀은 엿새〕 동안 일하여 네 모든 일을 하라’에서 이를 알 수 있다.
40. 뒤따르는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보면, 엄밀히 종의 일이나 수공 작업이 아니더라도 우리 자신의 일이라 부르는 모든 것이 금지됨을 알 수 있다.
41. 우리 자신의 일은 이생의 필요에 관한 일이다. 자연적이고 시민적인 일로, 직접 우리의 이득과 이익에 관계된다. 공부나 자유 학예의 실천처럼 본래 종의 일이 아닌 것도 그러하다. 여행이나 시민 사회의 문제를 처리하는 등 자유인과 종에게 공통된 일은 더욱 그러하다.
42. 사 58:3의 ‘너희가 기뻐하는 일을 하며 모든 일꾼에게 노동을 요구한다’는 말도 이런 뜻이다. 곧 자기 일을 부지런히 돌본다는 뜻이다. 제13절의 ‘네 길을 행한다’는 말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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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에서 언제나 불법인 악한 행위도 주로 다룬다. 제6절.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주의 날에 사람에 관한 모든 말이나 생각을 죄로 보아야 한다고 결론짓는 일부 경건한 신학자들은 잘못한 듯하다. 그
장이 다루는 날이 엄밀한 뜻의 안식일이든 엄숙한 절기이든,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과 생각을 부적절하다고 책망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자기 이득을 위한 일, 그 자체로 불법인 일, 거룩한 실천을 방해하는 일을 책망한다. 제3절과 제6절. 종의 일과 일상적인 일은 엄히 제한되므로 안식일에는 생활에 가장 알맞고 거의 필수적인 때인 경작기나 수확기에도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출 34:21. 성막을 짓는 일처럼 간접적으로 거룩한 일에 관계되는 일도 그러했다. 출 31:13. 일상적인 여행을 떠나거나(출 16장) 시장이나 장터에 가는 것은 더욱 허용되지 않았다. 느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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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다만 다음은 예외이다. 첫째. 일반적인 예의에 속하는 일이다. 언제나, 특히 예배에 구별된 날에는 품위 있게 행동해야 하므로 그에 필요한 것은 허용된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 특별한 필요가 지우는 일이다. 마 12:11. 사람이 스스로 필요하다고 만들어 내거나 꾸미는 일이 아니라, 미처 예상하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섭리로 피할 수 없게 된 일이다. 곧 성경 자체가 평상시의 일을 할 충분한 이유로 인정하는 필요이다. 셋째. 하나님의 예배와 영광에 직접 관계되는 일이다. 마 12:5, 요 5:8–9. 이 경우에는 본래 종의 일도 거룩한 행위의 성격을 띤다. 엄밀히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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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이 쉼 자체만 두고 보면 예배의 일부가 아니며 전에도 그러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배에 필요한 것으로 명하셨고 예배를 위한 것이므로, 그만큼 신앙과 하나님 예배에 속하는 순종의 일부이다.
45. 이 쉼과 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이날 특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다’라는 표현이 이를 뜻한다.
46. 여기서는 공적 예배를 가장 중시해야 한다. 그래서 안식일을 거룩한 모임이라 부른다. 레 23:13〔원문 표기. 해당 구절은 23:3〕, 행 13:14, 15:23, 16:13. 주의 날에 오전과 오후 모두 교회의 공적 모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안식일에 아침과 저녁 두 번 번제를 드린 일에서 충분히 드러난다. 민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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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그날의 나머지 시간은 경건을 실천하는 데 써야 한다. 옛날에도 안식일에만 드리는 제물이 있었지만, 매일 드리는 상번제와 그 전제를 생략해서는 안 되었다. 민 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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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공적 예배는 가장 엄숙히 드려야 하므로 성경 읽기, 묵상, 기도, 거룩한 대화, 하나님의 행위를 깊이 생각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로써 공적 예배에 더 잘 준비되고 그 예배가 우리에게 참으로 효력을 낼 수 있다.
49. 사람이 정한 절기를 주의 날과 같은 거룩한 날로 여기는 것은 모두 주의 날의 규례에 어긋난다.
50. 한 주에 오직 하루를 거룩하게 구별하는 것이 최초의 제정과 사도들의 글에 가장 잘 맞는다.
51. 유대인들도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절기만 합당하게 거룩한 날로 구별했다.
52. 다만 어느 날이든 경건하게 활용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북돋울 수 있다.
53. 또한 하나님께서 특별한 심판으로 더 엄숙한 금식을 요구하실 때에는 그날들을 비상한 안식일처럼 여겨야 한다.
54. 이날에 사람의 마음을 신앙의 실천에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업무와 활동과 잔치와 놀이 등도 이날의 준행에 어긋난다.

각주

225
알렉산드리아의 필론(기원전 약 20년–기원후 50년)을 가리킨다. 『세계에 관하여』 제14장이라는 표기는 부정확해 보이며, 『창조에 관하여』 제30절일 수 있다. 거기서 필론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며, 그날은 한 도시나 나라만의 절기가 아니라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의 절기라고 말한다. ↩
226
프란시스코 수아레스(1548–1617)는 스페인 예수회 사제이자 철학자·신학자이다. 살라망카 학파의 주요 인물로,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의 대표적 스콜라 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
227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스트로마타』 제5권. ↩
228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로도스에서 안식일에 강의하던 문법학자 디오게네스는 다른 요일에 찾아온 티베리우스에게 응답하지 않고, 종을 보내 일곱째 날에 돌아오라고 전했다. 『열두 황제전』 제3권 「티베리우스」 제32장. ↩
229
앞일을 모형으로 보여 준다는 뜻이다. ↩
230
잠시 중단한다는 뜻이다. ↩
231
곧 십계명 가운데 아홉 계명만 준행했다는 뜻이다. ↩
232
대신할 것으로 지정했다는 뜻이다. ↩
233
이 각주는 유대인의 하루가 해 질 때인 오후 다섯 시에 시작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금요일 저녁 다섯 시가 토요일 안식일의 시작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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