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옛신앙 라이브러리>>신학의 정수 - 윌리엄 에임스(1642년)

신학의 정수 - 윌리엄 에임스(1642년)

English|한국어|대역차례 ◀ ▶
제22장 만족
모두 펼치기 | 모두 접기
1. 만족은 하나님께서 주신 몫에 마음이 안식하는 덕이다. 딤전 6:6, 히 13:5, 빌 4:11.
구절 보기 ▾
2. 계명의 문구 자체가 보여 주듯, 만족은 열째 계명에서 명해진다. 이 계명을 모든 순종의 샘인 의의 내적이고 본래적인 순결함에만 돌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 순결함은 어느 한 계명에만 명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계명에 명해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열째 계명은 둘째 돌판에 속하지만, 그 순결함은 첫째 돌판에도 똑같이 해당한다.
3. 다만 둘째 돌판에 담긴 덕 가운데 만족보다 더 내적이고 본래의 의에 가까운 것은 없다. 만족은 우리를 이끌어 그 의를 묵상하고 구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다루면서 그 순결함을 함께 살피는 것은 합당하다.
4. 이 만족에는 이웃의 형통을 자기의 형통처럼 기뻐하는 마음이 따른다. 롬 12:15.
구절 보기 ▾
5. 이 만족과 기쁨에 이웃 사랑 전체의 절정과 완성이 있다. 이런 점에서 만족은 어느 정도 경건과 경건한 사람의 완성이기도 하다. 딤전 6:6. 만족을 동반하는 경건, 곧 온전한 만족을 낳는 경건은 큰 이익이다.
구절 보기 ▾
6. 그러므로 덜 온전한 것에서 더 온전한 것으로, 더 잘 알려진 것에서 덜 알려진 것으로 나아가는 순서에 따라 이 의무는 마지막 계명에서 명해진다.
7.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거나 원하든 이웃의 유익과 결부시키는 것은 가장 온전한 의무이며, 타고난 본성으로는 가장 알기 어려운 의무이다.
8. 그러므로 이 의무는 본성상 이웃에게 행할 의무 중 첫자리를 차지하고 다른 모든 의무의 토대가 된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 안에서는 가장 나중에 자리하므로 마지막에 명해진다.
9. 만족에 대립하는 것은 탐욕이다. 히 13:5.
구절 보기 ▾
10. 여기서 탐욕은 바라거나 원하는 타고난 능력이나, 그 능력이 자연스럽고 합당하게 작용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어느 한 계명에서 특별히 정죄하는 대신 율법 전체에서 정죄하는 우리 본성의 부패한 성향 전체도 가리키지 않는다. 무질서한 욕망 전부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그중 상당수는 신앙에 어긋나므로 첫째 돌판에서 정죄된다. 또한 이웃을 해치려는 모든 욕망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숙고하여 동의하고 실행하려는 뜻까지 품은 욕망은 각각 해당 계명에서 정죄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아직 부당한 방법으로 얻으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어도, 이웃의 좋은 것을 갖고 싶어 마음이 처음으로 자극되고 끌리는 욕망이다. 왕상 21:2, 막 10:19.
구절 보기 ▾
11. 이 불의의 첫 움직임은 그 근원인 본래의 부패와 매우 가까워, 많은 사람이 둘을 혼동한다. 그러나 첫째. 원죄는 타고난 성향처럼 우리 안에 계속 거하며, 이 땅에 사는 동안 늘 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 움직임들은 그 성향에서 나와 지나가는 행위이다. 둘째. 우리 안에 거하는 원죄는 모든 악한 행위261의 일반 원리인 데 비해, 여기서 정죄하는 행위는 분명히 이웃에 관한 것으로 한정된다.
12. 사도는 롬 7장에서 죄의 작용 가운데 하나로 전체를 나타내는 제유법을 써서 이 계명을 분명히 풀이한다. 제7절의 탐욕은 제5절의 죄의 정욕과 같고, 제8절에서 죄가 일으킨 탐욕과 같다. 따라서 그 안에 거하는 죄와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제7절 [원본, 개정본 표기].
구절 보기 ▾
13. 바울도 속했던 바리새파가 탐욕의 첫 움직임을 죄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놀랍지 않다. 그들과 가까운 친족262 격인 로마 가톨릭 교도들이 여전히 이를 완고하게 부인하기 때문이다.
14. 탐욕을 금하는 마지막 계명을 둘로 나누어263, 하나는 집을 탐하는 일에, 다른 하나는 아내와 그 뒤에 나오는 것들을 탐하는 일에 관한 것이라 하는 이들이 있다. 첫째. 그 구분에는 이치에 맞는 근거가 없다. 둘째. 그들은 열 말씀의 수를 유지하는 듯 보이려고 첫째 돌판의 둘째 계명을 아예 없애거나 첫째 계명에 불필요하게 붙는 말로 만들어야 한다. 많은 이들의 경우 더 분명한 까닭이 있다. 그들은 둘째 계명의 효력을 알아보면서도 그것이 자신들과 자기 미신에 적용되지 않는 듯 보이게 하려고 열째 계명을 둘로 찢어야 한다. 셋째. 어느 쪽이 아홉째이고 어느 쪽이 열째인지 확정할 수 없다. 율법을 되풀이하는 신 5:27〔원문 표기. 해당 구절은 5:21〕에서는 아내를 탐하는 일이 집을 탐하는 일보다 먼저 나오기 때문이다. 넷째. 두 탐욕이 서로 다른 불의라고 밝힐 수 없다. 그래서 그들 자신도 십계명을 풀이할 때 언제나 아홉째와 열째 계명을 한데 묶거나 뒤섞는다. 다섯째. 십계명의 문구 자체가 ‘탐내지 말라’는 한 행위를 금하고 ‘네 이웃의 것이라면 무엇이든’이라는 공통 대상을 가리킴으로써 하나의 계명임을 분명히 한다.
구절 보기 ▾
15. 자신을 무질서하게 사랑하는 마음은 탐욕의 원인이다. 딤후 3:2.
구절 보기 ▾
16. 이 자기 사랑은 이웃에게 짓는 죄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짓는 죄까지, 모든 죄의 토대이자 근원이라 할 수 있다. 딤후 3:4.
구절 보기 ▾
17. 요한은 이 욕망을 음식과 음욕에 관한 육신의 정욕, 외적 즐거움과 이익에 관한 안목의 정욕, 세상의 영광과 화려함에 관한 이생의 자랑으로 나눈다. 요일 2:16.
구절 보기 ▾
18. 이웃의 형통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에 대립하는 것은 시기, 곧 악한 눈(마 20:15)과 이웃의 해를 기뻐하는 일이다. 시 17:3–4, 옵 12절.
구절 보기 ▾
19. 이 마지막 계명은 율법 전체에서 어느 정도 풀이되는 정의의 완전함을 명한다. 첫째 계명이 신앙 전체를 어느 정도 명하는 것과 같다. 첫째 돌판의 첫 계명에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이자 큰 계명이 들어 있으며, 그와 같은 둘째 계명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둘째 돌판의 마지막 계명에 들어 있다.
20. 각 계명에서 빛나는 이 완전함으로 보아, 믿는 자라도 이 생에서 받은 은혜로 율법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다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옳게 말하듯, 순종의 규범과 척도는 적극적으로는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이며 소극적으로는 ‘탐내지 말라’이다. 이 생에서는 둘 다 완전히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아무도 율법의 요구를 정확히 충족할 수 없다.
21. 이 생에서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알고(고전 13:9), 따라서 부분적으로만 행한다. 우리는 성령의 첫 열매만 받았으므로(롬 8:23) 온전히 영적인 율법을 정확히 준행할 수 없다(롬 7:14). 우리에게는 성령을 거슬러 욕망하는 육체가 있으므로(갈 5:17),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 우리를 끌어당기는 정욕 없이 순종할 수 없다. 끝으로 우리는 온전하지 않으므로(빌 3:12) 온전히 순종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과 입에 언제나 ‘우리의 빚을 용서해 주소서’라는 간구를 두어야 한다.
구절 보기 ▾
22. 그러나 그리스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벼우며(마 11:30), 그분의 계명은 무겁지 않다고 하는 것은 참되고 옳다(요일 5:3). 여기서 율법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 이해된다. 첫째. 율법을 마땅히 지켜야 할 완전한 정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즐거워하는 믿는 자들이 실제로 준행하는 면에서 본다. 롬 7:22, 시 119:14, 16. 그들에게 남은 불완전함은 괴롭고 힘들지만, 이러한 준행은 그들의 영혼에 안식을 준다. 마 11:29. 둘째. 육체가 아니라 영에 비추어 본다. 마 26:41. 셋째. 우리의 노력에 남은 죄와 모든 불완전함의 용서가 함께 주어진다는 점에서 본다. 넷째. 죽이는 율법의 문자와 비교하여 본다. 다섯째. 하나님께서 이제 시작된 불완전한 순종에 주시기로 한 상과 비교하여 본다. 그런 뜻에서 모든 고난도 가볍다고 여겨진다. 고후 4: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이 쉽고 가벼운 것은 우리의 힘에 맞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구절 보기 ▾
아멘.
끝

각주

261
성격이나 질이 망가지거나 도덕적으로 부패하거나 효력을 잃었다는 뜻이다. 선한 행위조차 이 부패에 물든다. ↩
262
여기서 ‘german’은 혈연으로 가깝다는 뜻이다. 따라서 ‘cousin germans’는 같은 뜻을 겹쳐 쓴 표현이다. ↩
263
츠빙글리 등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달리 루터는 히브리어 성경 대신 라틴어 불가타의 번호 매김을 따랐다. 그는 형상 금지를 별개의 둘째 계명으로 보지 않고 첫째 계명의 부연으로 보았다. ↩
◀ 제21장 진실을 말함과 정직성64 / 64차례 ▶
홈|사이트 소개|고전 성경의 유산|복음의 길|옛신앙|맥체인 성경읽기|믿음 체크북|문의하기